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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같이/인문,문학

작별하지 않는다: 먹먹하다

by 책과같이 2024. 12.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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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은 모든 작품에서 역사적 트라우마와 보이지 않는
규범들을 정면으로 마주하며, 각각의 작품에서 인간 삶의 연약함을 드러낸다.
육체와 영혼, 산 자와 죽은 자의 연결에 대한 독특한 인식을 지니고 있으며,
시적이고 실험적인 문체로 현대 산문의 혁신가로 자리매김했다.

- 노벨문학상 선정 이유 -

 

한강 작가님의 <작별하지 않는다>입니다.


아버지와 어머니, 오빠와 여덟 살 여동생 시신을 찾으려고. 여기저기 포개지고 쓰러진 사람들을 확인하는데, 간밤부터 내린 눈이 얼굴마다 얇게 덮여서 얼어 있었대. 눈 때문에 얼굴을 알아볼 수 없으니까. 이모가 차마 맨손으론 못하고 손수건으로 일일이 눈송이를 닦아내 확인을 했대. 내가 닦을 테니까 너는 잘 봐,라고 이모가 말했다고 했어. 죽은 얼굴들을 만지는 걸 동생한테 시키지 않으려고 그랬을 텐데. 잘 보라는 그 말이 이상하게 무서워서 엄마는 이모 소맷자락을 붙잡고, 질끈 눈을 감고서 매달리다시피 걸었대. 보라고, 네가 잘 보고 얘기해 주라고 이모가 말할 때마다 눈을 뜨고 억지로 봤대. 그날 똑똑히 알았다는 거야. 죽으면 사람의 몸이 차가워진다는 걸. 맨 뺨에 눈이 쌓이고 피 어린 살얼음이 낀다는 걸. -p84-
수십 년 전 생시에 보았고 얼마 전 꿈에서 보았던, 녹지 않는 그 눈송이들의 인과관계가 당신의 인생을 꿰뚫는 가장 무서운 논리이기라도 한 것처럼. 계속해서 엄마는 말했어.
이렇게 눈이 내리면 생각나. 내가 직접 본 것도 아닌데, 그 학교 운동장을 저녁까지 헤매 다녔다는 여자애가. 열입곱 살 먹은 언니가 어른인 줄 알고 그 소맷자락에, 눈을 뜨지도 감지도 못하고 그 팔에 매달려 걸었다는 열세 살 아이가. -p87-
물은 언제까지나 사라지지 않고 순환하지 않나. 그렇다면 인선이 맞으며 자란 눈송이가 지금 내 얼굴에 떨어지는 눈송이가 아니란 법이 없다. 인선의 어머니가 보았다던 학교 운동장의 사람들이 이어 떠올라 나는 무릎을 안고 있던 팔을 푼다. 무딘 콧날과 눈꺼풀에 쌓인 눈을 닦아낸다. 그들의 얼굴에 쌓였던 눈과 지금 내 손에 묻은 눈이 같은 것이 나니란 법이 없다.
- p133-
나한테는 앞장서 가라고 하고, 아버지는 바닷게처럼 옆걸음을 걸어서 나를 따라왔어요. 두 사람의 발자국을 조릿대 잎으로 쓸어 지우면서.
이디서 어디로 가, 아빠?
내가 멈춰서 물을 때마다 아버지는 차분한 목소리로 방향을 알려줬어요. 더 이상 길이 없는 산속으로 접어들면 나에게 등을 내밀어 업히라고 하고, 그때부턴 당신의 발자국만 쓸어내며 비탈을 올랐어요. 업힌 채로 나는 발자국들이 사라지는 걸 똑똑히 지켜봤어요. 마술 같았어요. 매 순간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는 사람들처럼, 우린 단 한 점의 발자국도 남기지 않으며 걷고 있었어요. -p163-

젖먹이 아기도?
절멸이 목적이었으니까.
무엇을 절멸해?
빨갱이들을.
-p220-

나는 바닷고기를 안 먹어요. 그 시국 때는 흉년에다가 젖먹이까지 딸려 있으니까, 내가 안 먹어 젖이 안 나오면 새끼가 죽을 형편이니 할 수 없이 닥치는 대로 먹었지요. 하지만 살 만해진 다음부터는 이날까지 한 점도 안 먹었습니다. 그 사람들을 갯것들이 다 뜯어먹었을 거 아닙니까? -p225-
어둑어둑해지는데 총소리가 멈춰서 문구멍으로 내다봤더니, 피투성이로 모래밭에 엎어져 있는 사람들을 군인들이 바다에 던지고 있었습니다. 처음엔 옷가지들이 바다에 떠 있는 줄 알았는데 그게 다 죽은 사람들이었어요. 다음날 새벽에 내가 우리 아기를 업고 아기 아빠 몰래 바닷가로 갔습니다. 떠밀려온 젖먹이가 꼭 있을 것 같아서 샅샅이 찾았는데 안 보였어요. 사람이 그렇게 많았는데, 옷가지 한 장 신발 한 짝도 없었어요. 총살했던 자리는 밤사이 썰물에 쓸려가서 핏자국 하나 없이 깨끗했습니다. 이렇게 하려고 모래밭에서 죽였구나, 생각이 들었어요. -p226-
그 겨울 삼만 명의 사람들이 이 섬에서 살해되고, 이듬해 여름 육지에서 이십만 명이 살해된 건 우연의 연속이 아니야. 이섬에 사는 삼십만 명을 다 죽여서라도 공산화를 막으라는 미군정의 명령이 있었고, 그걸 실현할 의지와 원한이 장전된 이북 출신 극우 청년단원들이 이 주간의 훈련을 마친 뒤 경찰복과 군복을 입고 섬으로 들어왔고, 해안이 봉쇄되었고, 언론이 통제되었고, 갓난아기의 머리에 총을 겨누는 광기가 허락되었고 오히려 포상되었고, 그렇게 죽은 열 살 미만 아이들이 천오백 명이었고, 그 전례에 피가 마르기 전에 전쟁이 터졌고, 이 섬에서 했던 그대로 모든 도시와 마을에서 추려낸 이십만 명이 트럭으로 운반되었고, 수용되고 총살돼 암매장되었고, 누구도 유해를 수습하는 게 허락되지 않았어. 전쟁은 끝난 게 아니라 휴전된 것뿐이었으니까. 휴전선 너머에 여전히 적이 있었으니까. 낙인찍힌 유족들도, 입을 떼는 순간 적의 편으로 낙인찍힐 다른 모든 사람들도 침묵했으니까. 골짜기와 광산과 활주로 아래에서 구슬 무더기와 구멍 뚫린 조그만 두개골들이 발굴될 때까지 그렇게 수십 년이 흘렀고, 아직도 뼈와 뼈들이 뒤섞인 채 묻혀 있어.
그 아이들. 절멸을 위해 죽인 아이들. -p318-

쉽게 읽히지는 않았다. 4·3이라는 아픈 역사를 담고 있어서 더 그런 것 같다. 넘기기에는 너무 먹먹한 장면도 많이 있다. 사람들이 어떻게 이렇게 잔인할 수 있지? 이해가 안 되는 생각들이 물밀듯이 내 머릿속으로 들어온다. 아직도 4·3이 제대로 규정되어 있지 않다고 들었다. 다시는 이땅에 이런 비극적인 역사가 일어나지 않았으면 한다. 하마터면 이런 비극이 얼마전 '비상계엄'으로 일어 날 수도 있었다. 정말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4·3을 잊지 않고 기억하며, 억울하게 죽어간 사람들을 기리며, 사람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겠다고 스스로 다짐해본다.
이 책을 꼭 보지 않아도 된다. 그래도 이 책은 사서 책장에 꽂아놓자. 어떤 책들은 읽지 않고 가지고만 있어도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이 책도 그 책중에 하나다. 책이 나를 부르고, 내가 그 부름에 응답할 수 있을 준비가 되었을 때 책을 펼쳐보자. 

폭력에 훼손되고 공포에 짓눌려도 인간은 포기하지 않는다.
작별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딸의 눈과 입을 통해 전해진다.
폭력은 육체의 절멸을 기도 하지만 기억은 육체 없이 영원하다.
죽은 이를 살려낼수는 없지만 죽음을 계속 살아 있게 할 수는 있다.
작별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고통에 도달하는 길은 고통뿐이라는 듯이. 
재현의 윤리에 대한 가장 결연한 답변이 여기 있다.

- 신형철 문학평론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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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별하지 않는다 - 예스24

2023 프랑스 메디치 외국문학상 수상무엇을 생각하면 견딜 수 있나.가슴에 활활 일어나는 불이 없다면.기어이 돌아가 껴안을 네가 없다면.이곳에 살았던 이들로부터, 이곳에 살아 있는 이들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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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별하지 않는다 | 한강 - 교보문고

작별하지 않는다 | 무엇을 생각하면 견딜 수 있나. 가슴에 활활 일어나는 불이 없다면. 기어이 돌아가 껴안을 네가 없다면. 이곳에 살았던 이들로부터, 이곳에 살아 있는 이들로부터 꿈처럼 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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