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핸드폰에 부고가 찍히면 죽음은 배달상품처럼 눈앞에 와 있다.
액정화면 속에서 죽음은 몇 줄의 정보로 변해 있다. 무한 공간을 날아온 이 정보는 발신과 수신 사이에 시차가 없다.액정화면 속에서 죽음은 사물화 되어 있고 사물화 된 만큼 허구로 느껴지지만 죽음은 확실히 배달되어 있고, 조위금을 기다린다는 은행계좌도 찍혀있다.
부고를 받을 때마다 죽음은 이행해야만 할 일상의 과업처럼 느껴진다.마감을 지켜야 하는 원고 쓰기나 친구의 자식들 결혼식이나 며칠 먼저 죽은 친구의 빈소에 흰 돈봉투 들고 가서 얼굴을 내밀어야 하는 일처럼 죽음을 루틴으로 여기는 태도는
종교적으로는 경건하지 못하지만, 깨닫지 못한 중생의 실무이행으로서 정당하다. 애착 가던 것들과 삶을 구성하고 있던 치열하고 졸렬한 조건들이 서서히 물러가는 풍경은 쓸쓸해도 견딜 만하다. 이것은 속수무책이다.
죽으면 말길이 끊어져서 죽은 자는 산 자에게 죽음의 내용을 전할 수 없고, 죽은 자는 죽었기 때문에 죽음을 인지할 수 없다.
인간은 그저 죽을뿐, 죽음을 경험할 수는 없다. 화장장에 다녀온 날 이후로 저녁마다 삶의 무거움과 죽음의 가벼움을 생각했다. 죽음이 저토로 가벼우므로 나는 이 가벼움으로 남은 삶의 하중을 버티어 낼 수 있다. 뼛가루를 들여다 보니까, 일상생활 하듯이, 세수하고 면도하듯이, 그렇게 가볍게 죽어야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와인을 마시면 몸과 마음이 혼곤해진다. 와인에는 현실과 부딪치는 술맛의 저항감이 없다. 와인의 취기는 계통이 없다. 와인은 현실을 서서히 지우면서 다가온다. 와인의 취기는 비논리적이고 두리뭉실하다.
막걸리는 생활의 술이다. 막걸리는 술과 밥의 중간쯤 되는 자리에 있다. 막걸리는 술을 밥쪽으로 끌어당긴다. 사람은 밥만 먹고는 살 수가 없고 술만 마시고도 살 수가 없는데, 막걸리는 그 사이에서 어중간하다. 나는 막걸리를 즐겨 마시지는 않는다. 나는 막걸리와 밥이 겹치는 대목의 정서를 좋아하진 않는다. 막걸리는 텁텁하다.
소주. 아아! 소주. 한국의 근대사에서 소주가 정신의 역사와 대중정서에 미친 영향을 사회과학적으로 설명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소주는 대중의 술이며 현실의 술로서 한 시대의 정서를 감당해 왔지만 풍미가 없고 색감이 없고 오직 찌르는 취기만 있다. 소주는 아귀다툼하고 희로애락 하고 생로병사하는 이 아수라의 술이다.
사케의 맛은 쌀밥의 범위를 넘어서지 않는다. 사케가 사람의 마음에 작동하는 방식은 논에서 익어 가는 쌀이 아니라 밥솥에서 조금씩 새어나오는 김의 방식이다. 사케의 맛은 쌀의 엑기스를 추출해 내고 사케의 취기에는 도작농토의 질감이 들어 있다. 사케는 깊이 스며서 넓게 퍼지고 익어 가는 밥의 안온함으로 몸을 덮여준다. 사케를 마실 때 나는 술이 나를 안아주는 느낌을 받는다. 사케는 겨울의 술이고 나인 든 사람의 술이다.
내가 즐겨 마신 술은 위스키다. 위스키의 취기는 논리적이고 명석하다. 위스키를 몇방울 목구멍으로 넘기면 술은 면도날로 목구멍을 찢듯이 곧장 내려간다. 그 느낌은 전류와 같다. 위스키를 넘기면, 호수에 돌을 던지듯이 그 전류의 잔잔한 여파들이 몸속으로 퍼진다. 몸은 이 전류에 저항하면서도 이를 받아들인다. 저항과 수용을 거듭하면 저항의 힘은 적어지고 수용의 폭은 넓어져서 취기가 쌓인다. 위스키의 취기는 이리저리 흩어져서 쏘다니지 않고 한 개의 정점으로 수렴된다.
온 세상 사람들이 너도나도 위스키를 마신다 해도 위스키는 공동체의 술이라기보다는 개인의 술이다. 위스키는 단독자를 정서의 정점으로 이끌고 간다. 그래서 위스키를 좋아하면 혼술을 자주 마시게 되고 알코올중독자가 되기 쉽다.
요즈엔 거의 술을 마시지 않는데 가끔씩 술 마시던 날들의 어수선한 열정과 들뜸이 그립다. 엉망으로 취한 다음 날 아침의 절망감이 혐오스럽기보다는 안쓰럽다. 저녁에 동네 술집에 모여서 술 마시는 젊은이들의 웃음소리를 들으면 나는 이 고해의 아름다움을 알게 된다.
술은 멀어져 갔지만, 나는 아직 술을 끊은 것이 아니다. 나는 희망의 힘에 의지해서 살지 않고 이런 미완성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
나는 오후에 두어 시간쯤 햇볕은 쪼이면서 늘그막의 세월을 보낸다. 혀가 빠지게 일했던 세월도 돌이켜보면 헛되어 보이는데, 햇볕은 쪼이면서 허송세월할때 내 몸과 마음은 빛과 볕으로 가득찬다. 나는 허송세월로 바쁘다.
깊이 내려앉은 해가 빛과 색을 모두 거두어들이고 젊은 어미니들일 노는 아이들을 핸드폰으로 불러들이면 나는 집으로 돌아간다. 또 하루가 노을 속으로 사위어 간다.
어느날 민속박물관에 놀러갔다가 전쟁 때 쓰던 군용 철모에 긴 손잡이를 연결한 똥바가지를 보았다. 똥바가지는 전쟁의 야만성을 생활속으로 용해시키면서 웃음 띤 표정을 하고 있었다. 어느 산악고지 참호속에서 전사한 병사의 넋이 생활도구로 변해서 돌아온 것이라고 나 생각했다. 그날 집에 돌아와서 나는, 생활은 크구나, 라고 글자 여섯개를 썼다.
이 책을 바쳐서 벽에 부딪혀 죽은 새들과 철모를 남기고 간 병사의 넋을 위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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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송세월 - 예스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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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송세월 | 김훈 - 교보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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