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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문태준' 시인의 '시월에'입니다.
시월에
오이는 아주 늙고 토란잎은 매우 시들었다.
산 밑에는 노란 감국화가 한 무더기 헤죽, 헤죽 웃는다.
웃음이 가시는 입가에 잔주름이 자글자글하다.
꽃빛이 사그라들고 있다.
들길을 걸어가며 한 팔이 뺨을 어루만지는 사이에도
다른 팔이 계속 위아래로 흔들리며 따라왔다는 걸
문득 알았다.
집에 와 물에 찬밥을 둘둘 말아 오물오물거리는데
눈구멍에서 눈물이 돌고 돌다
시월은 헐린 제비집 자리 같다.
아, 오늘은 시월처럼 집에 아무도 없다.

오종종하지 않고 시원시원하다. 말씨가 그렇고 언어의 바닥에 깔린 분위기가 그렇다. 필시 시를 쓴 시인의 마음이 그렇다는 것일 것이다. 선하고 부드럽고 맑은 무늬가 보인다.
젊은 시인의 어법인데 의젓하고 어른스럽다. 나를 가르친다. 마음을 서느럽게 해준다. 하나의 정화이고 청소다. 시의 고급 기능이 여기에 있다. 마음의 찌꺼기, 구겨진 마음을 펼쳐준다.
인간의 마음은 본래는 깨끗하고 맑은 것이었는데 이럭저럭 살다 보니 후질러지고 더러워졌다. 이것을 빨아야 한다. 마음을 빠는데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바로 시를 읽는 일이다.
- 나태주 시인의 노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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