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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나태주' 시인의 '대숲 아래서'입니다.
대숲 아래서
1
바람은 구름을 몰고
구름은 생각을 몰고
다시 생각은 대숲을 몰고
대숲 아래 내 마음은 낙엽을 몬다.
2
밤새도록 댓잎에 별빛 어리듯
그슬린 등피에는 네 얼굴이 어리고
밤 깊어 대숲에는 후둑이다 가는 밤 소나기 소리
그리고도 간간이 사운대다 가는 밤바람 소리.
3
어제는 보고 싶다 편지 쓰고
어젯밤 꾼엔 너를 만나 쓰러져 울었다
자고 나니 눈두덩엔 메마른 눈물자죽.
문을 여니 산골엔 실비단 안개.
4
모두가 내 것만은 아닌 가을,
해 지는 서녘구름만이 내 차지다.
동구 밖에 떠드는 애들의
소리만이 내 차지다
또한 동구 밖에서부터 피어오르는
밤안개만이 내 차지다.
하기는 모두가 내 것만은 아닌 것도 아닌
이 가을,
저녁밥 일찍이 먹고
우물가에 산보 나온
달님만이 내 차지다.
물에 빠져 머리칼 헹구는
달님만이 내 차지다.


나의 작품이다. 1971년「서울신문」신춘문예에 당선된 작품이다. 그렇다. 이 작품이 나를 시인으로 만들어주었다. 얼마나 오래 이 시를 입에 달고 살았던가. 따듬따듬 외우는 시 한 편이 또 이 시다.
나의 청춘이 들어있다. 침몰 직전의 청춘. 난파선과 같은 날들이 넘실거린다. 그런데도 시의 내용이 온건한 건 오로지 문장의 덕성이고 시가 가진 은총이다.
실상 데뷔작이 대표작이 되면 그 시인의 제자리걸음으로 발전 없는 시인이고 끝내 눈감은 시인이다. 한동안 이 작품이 나의 대표작 행세를 하다가 시「풀꽃」으로 대체된 일은 매우 다행스런 일이다.
- 나태주 시인의 노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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