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오늘은 '김기림' 시인의 '길'입니다.
길
나의 소년 시절은 은빛 바다가 엿보이는 그 긴 언덕길을
어머니의 상여(喪輿)와 함께 꼬부라져 돌아갔다.
내 첫사랑도 그 길 위에서 조약돌처럼 집었다가
조약돌처럼 잃어버렸다.
그래서 나는 푸른 하늘빛에 호저 때 없이 그 길을 넘어
강가로 내려갔다가도 노을에 함북 자주빛으로 젖어서
돌아오곤 했다.
그 강가에는 봄이, 여름이, 가을이 나의 나이와 함께
여러 번 댕겨갔다. 까마귀도 날아가고 두루미도
떠나간 다음에는 누런 모래둔과 그리고
어두운 내 마음이 남아서 몸서리쳤다.
그런 날은 항용 감기를 마나서 돌아와 앓았다.
할아버지도 언제 난 지를 모른다는 동구 밖
그 늙은 버드나무 밑에서 나는 지금도 돌아오지 않는 어머니,
돌아오지 않는 계집애, 돌아오지 않는 이야기가
돌아올 것만 같아 멍하니 기다려본다.
그러면 어느새 어둠이 기어와서 내 뺨의 얼룩을 씻어준다.

부끄럽게도 나는 이 글이 김기림 시인의 것인 줄 알지 못했다. 가수 이동원 씨가 노래를 부르러 나와 시 낭송을 했을 때 처음 알았다.
더욱 부끄러운 것은 이 글이 애당초 시가 아니고 산문으로 쓰여졌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시집에서 찾지 못한 글을 산문집에서 찾았다.
그렇지만 이 글은 빼어난 산문시다. 결코 시인이 감정 과잉을 하지 않았는데도 글을 읽고 나면 저절로 감정 과잉이 된다. 눈물이 핑 돈다.
- 나태주 시인의 노트 -

반응형
'그냥일상 > 필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오늘의 필사 : 시월에(문태준) (26) | 2026.01.16 |
|---|---|
| 오늘의 필사 : 살아야겠다(폴 발레리) (20) | 2026.01.14 |
| 오늘의 필사 : 대숲 아래서(나태주) (10) | 2026.01.12 |
| 오늘의 필사 : 어린것(나희덕) (16) | 2026.01.11 |
| 오늘의 필사 : 엄마가 휴가를 나온다면(정채봉) (9) | 2026.01.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