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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민 교수님의 <한국이란 무엇인가>입니다. 개인적으로 새롭게 알게 되었거나 괜찮다고 생각하는 문장들입니다.
고전 한문에서 '인간(人間)'이란 표현은 인간이 아니라 '세상'을 뜻한다. '사람'을 나타낼 때는 사람 '인'자를 쓰고, '세상'을 나타낼 때는 '인간'이란 단어를 썼다. 그러니 홍익인간은 슈퍼히어로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널리 세상을 이롭게 하다"라는 뜻이다. -p22
'홍익인간'은 인간의 목소리가 아니라 하늘신의 목소리다. 주어가 하늘신임을 생각하면 "널리 세상을 이롭게 하다"라는 말은 더 이상 밋밋하게 들리지 않는다. 하늘신이 하늘에 관심을 두지 않고 하필 저 아래 인간들이 사는 세상에 관심을 둔다니, 이건 특이하지 않은가. -p24
단군신화의 진짜 인간관은 웅녀에게 응축되어 있다. 바로 문명화를 위해 고난을 기꺼이 감수하는 인간, 미래의 새로운 자신을 위해 오랫동안 인내할 수 있는 인간, 변화를 위한 자기 통제를 해내는 인간이 바로 그것이다. -p33
일본 제국주의가 집요할 정도로 특정 질서를 한반도에 이식하려 하면 할수록 한반도 내에서 미시적 저항의 여지 역시 늘어났다고 할 수 있다. 해외의 독립투쟁에 더하여 국내의 미시적 저항에 접한 제국주의자들은 타국을 직접 지배하는 일이 생각보다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한다. 그 미시적 투쟁에 의해 제국주의자들의 기력은 소진되어 가고, 합병할 당시 꿈꾸었던 속 편한 나날은 결코 오지 않는다. 이렇게 하면, 광의의 독립운동은 무장투쟁 이외의 영역에서도 일어났다고 할 수 있다. -p112
무릇 욕망은 충족되지 않을 때 가장 강하고, 충족하고 났을 때 가장 약하다. 예컨대 식색(食色)의 욕망을 약하게 하는 방법은 과하게 먹거나 과하게 성행위를 하는 것이다. 하고 나면 욕망은 사그라든다. 반면, 식색의 욕망을 강하게 하는 방법은 먹거나 성행위를 하지 않는 것이다. 충족되지 않은 욕망은 더 절실해진다. 이것이 욕망의 동학이다.
실로 한용운은 <수(繍)의 비밀>이란 시에서 일부러 바느질을 완성하지 않는 마음에 대해 노래한 적이 있다. "이 작은 주머니는 짓기 싫어서 짓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짓고 싶어서 다 짓지 않은 것입니다." 주머니를 다 짓고 나면 욕망이 다 해소되어 버리므로, 욕망을 유지하기 위해 일부러 주머니를 완성하지 않는 것이다. -p127
욕망의 동학을 고려한다면, 님이 떠나 버리고 침묵하는 이 망국의 상황이야말로 애국의 욕망을 불태울 수 있는 최적의 상황인 셈이다. 즉 <님의 침묵>의 메시지는 님이 부재(침묵)함에도 '불구하고' 사랑한다는 것이 아니라 님이 부재하기 '때문에' 사랑한다는,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망국은 애국의 최적 조건이니, 좌절하지 말고 애국의 욕망을 불태우라. -p129
야반도주라는 혁명적 사태를 치러냈지만, 알고 보면 의탁 대상을 아버지에서 남편으로 바꾼 것에 불과하다. 사랑이란 말로 치장했을 뿐, 결혼은 결국 또 다른 타자에의 의존이었던 것으로 판명된다. 바로 그 의존성 때문에 결혼 생활도 위기에 처한다. 야반도주라는 큰 희생을 치르고 결혼했다고 생각하기에, 남편에게 그만큼 큰 보상과 관심을 요구하고, 그것이 여의치 않자 가정은 무너지기 시작한다. -p156
비문과 비약으로 가득 찬 주장을 해도 고쳐주는 사람이 드물기에 자유로울 것이다. 만만치 않은 숙제로 괴롭히는 사람이 드물기에 자유로울 것이다. 학점만 잘 주는 수업을 쇼핑할 수 있기에 자유로울 것이다. 학생들은 존재의 고독에서 오는 공포와 싸우기보다는 취직의 공포와 싸운다. 공포에 질린 포유류가 되어 앞다투어 취직이 용이한 곳, 학점이 수월한 곳으로 몰려간다. 누가 그들을 탓할 수 있으랴. -p181
사회학자 베르너 스타크는 "이데올로기는 거짓말과 완전히 같지는 않다. 거짓말쟁이는 최소한 냉소주의에라도 이를 수 있지만 이데올로기에 빠진 자는 단지 바보로 남을 뿐이다."라는 취지의 말을 한 적이 있다. 단순한 거짓말쟁이는 진실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다. 마치 도건이 의사행세를 할 때 자기가 의사가 아니라 가난한 실업자라는 진신을 잘 알고 있었던 거처럼. 진실이 무엇인지 알고 있으면서 남을 호도하는 것이 거짓말쟁이다. 이데올로기에 빠진 자, 혹은 사이비 종교인은 다르다. 그들은 남들뿐 아니라 자기 자신도 속여야 한다. 자기가 먼저 속아야 자신감을 가지고 남들을 속일 수 있다. -p186
저서 <몸에 대하여>에서 영국의 정치철학자 토머스 홉스는 한술 더 뜬다. 만약에 테세우스의 배에서 나온 낡은 판자들을 버리지 않고 고스란히 모아 똑같은 배를 만든다면, 그 배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새로운 판자로 개비한 첫 번째 배와 낡은 판자를 사용해 만든 두 번째 배중 어느 것이 진정한 테세우스의 배인가?
만약에 현재의 한국인들이 모두 어디론가 이민 가서 나라를 세우고, 현재 한반도에는 외국에서 이민 온 사람들이 살고 있다고 생각해 보자. 둘 중 어느 나라가 진정한 한국인가? 단군의 자손이라는 신화적 설명으로 과연 이 정체성에 대한 질문에 답할 수 있을까. -p201
<미국의 민주주의>에서 토크빌은 저질 정치인들이 난무하는 원인으로 욕망, 기회, 능력을 거론했다. 일단 적임자를 선출할 기회가 드물다. 적임자는 진흙탕이 된 정치판에 뛰어들려고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물론 정치판에 들어가지 않는다고 그가 훌륭한 사람이라는 보장은 없다). 적임자는 사리사욕을 추구하지 않을 것이므로, 그가 정치판에 들어가서 얻을 것이라고는 피곤함뿐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적임자는 오히려 은거하는 경향이 있다.
그뿐인가. 좋은 정치인을 뽑고 싶은 욕망도 없다. 탁월한 사람을 보면 시기심이 끓어올라서 어떻게든 그의 흠을 잡고 비방하고, 끌어내리고 싶어 한다. 그러다 보면, 결국 시기심을 느낄 필요조차 없는 범용 한 인물이 정치계에 남게 된다. 그렇게 해서 선출된 정치인은 자기 능력에 넘치는 횡재?를 한 셈이 된, 다시 오기 어려운 그 자리에 집착하게 된다. 그러니 오래 권세를 누릴 가능성이 있다.
그뿐인가. 좋은 정치인을 판별할 능력도 부족하다. 겉으로 드러난 후보 커리어가 좋아봐야 그것이 진정 그의 능력을 반영하는지 불확실하다. 연설 솜씨가 뛰어나보아야 과연 그가 충분한 행정 능력이 있는지 불확실하다. 그 개인은 훌륭할지 몰라도 일을 함께할 그이 추종자들이 부패한 이들인지도 모른다. 누가 좋은 정치인인지 판별하기 이처럼 어려우니, 그저 개인적인 인연이 있거나, 자신에게 편의를 제공한 적이 있거나 제공할 것 같은 사람을 뽑게 된다. -p239
파국을 예감하면 사람들은 공포에 질리기 시작하고, 공포에 질린 사람들은 인간성을 버리기 시작한다. 인간보다 인간성이 먼저 죽는다. 친절을 버리고, 위선을 버리고, 염치를 버리고, 돌봄을 버리고, 연민을 버리고, 관용을 버리고, 예의를 버리고, 인권을 버리고, 끝내 지켜야 할 가치들을 쓰레기처럼 버린다. 바로 그렇게 삶은 죽음 이외의 방식으로도 끝장날 수 있다. -p287



한국에 대한 어떤 문제를 제시하고 나아갈 방향, 해결 방법 등을 좀 알 수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한국'이라는 타이틀을 뺐으면 기대감과 내용의 거리감은 좀 덜했을 것 같다. 지극히 개인적인 짧은 소견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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