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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일상/필사

오늘의 필사 : 부부(함민복)

by 책과같이 2025. 12.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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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함민복' 시인의 '부부'입니다. 

부부

긴 상이 있다.
한 아름에 잡히지 않아 같이 들어야 한다. 
좁은 문이 나타나면
한 사람은 등을 앞으로 하고 걸어야 한다. 
뒤로 걷는 사람은 앞으로 걷는 사람을 읽으며
걸음을 옮겨야 한다. 
잠시 허리를 펴거나 굽힐 때
서로 높이를 조절해야 한다. 
다 온 것 같다고 
먼저 탕 하고 상을 내려놓아서도 안 된다. 
걸음의 속도도 맞추어야 한다.
한 발 
또 한발

 


일화가 있다. 시인이 절친한 후배로부터 결혼식 주례를 부탁받았다고 한다. 그런데 정작 시인 자신은 노총각이었다는 것. 거절하다 못해 끝내 주례를 서긴 했고, 그 뒤에 결혼식에서 한 주례사를 바탕으로 시 한 편을 썼다고 한다. 그 시가 바로 위의 시라는 것.

아직 결혼도 하지 않은 총각이 주례를 섰다는 것도 특별하고 그런 선배에게 주례 부탁을 한 후배도 특별하다. 더욱 특별한 것은 결혼도 해보지 않은 사람이 까다롭고 복잡한 부부생활의 비밀을 잘도 알아내고 그것을 시로 쓰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놀라운 일이다. 시인의 직관과 시의 비유가 협동한 아름다운 결과라 할 것이다. 

50년 가까이 함께 산 우리 부부도 가끔은 집안에서 큰 상을 마주 들고 다니는 일이 있는데 그럴 때마다 나는 함민복 시인의 시 시를 떠올린다. '한발/또한 발', '걸음의 속도'를 맞추어서 하나둘, 하나둘, 조심스럽게, 천천히, 앞으로 앞으로, 또 옆으로.

- 나태주 시인의 노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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