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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 작가님의 <허송세월>에 나오는 '허송세월'입니다.
허송세월
나는 내가 사는 마을의 길 건너,
일산 호수공원 벤치에 앉아서 햇볕을 쪼인다.
햇볕을 쪼일 때,
나와 해는 직접 마주 대해서 대등한 자연물이 된다.
나와 해 사이에 걸리적거리는 것이 없어서
해에서 폭발하는 빛고 볕이 바로 내 몸에 닿는다.
나와 해 사이에는 사이가 없다.
그때 내 몸의 모든 세포가 깨어나고 숨구멍이 열린다.
빛과 볕이 내 창자와 실핏줄의 먼 구석에까지 닿아서
음습한 오지가 환해지고 공해에 찌든 간과 허파가 기지개를 켠다.
햇볕을 쪼일때,
나는 햇볕을 마지고 마시고 햇볕에 내 몸을 부빈다.
햇볕을 쪼일때,
내 몸의 관능은 우주 공간으로 확장되어서
나는 옷을 모두 벗고 발가숭이가
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나는 오후에 두어 시간쯤 햇볕을 쪼이면서
늘그막의 세월을 보낸다.
해는 내 노년의 상대다.
젊었을 때 나는 몸에 햇볕이 닿아도
이것이 무슨 일인지 알지 못했고,
나와 해 사이의 공간을 들여다보지 못했다.
지나간 시간의 햇볕은 돌이킬 수 없고
내일의 햇볕은 당길수 없으니
지금의 햇볕을 쪼일 수밖에 없는데,
햇볕에는 지나감도 없고 다가옴도 없어서
햇볕은 늘 지금 내가 있는 자리에 온다.
햇볕은 신생하는 현재의 빛이고 지금 이 자리의 빛이다.
혀가 빠지게 일했던 세월도 돌이켜보면 헛되어 보이는데,
햇볕을 쪼이면서 허송세월할 때 내 몸과 마음은
빛과 볕으로 가득하다.
나는 허송세월로 바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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