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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김훈 작가님의 책 <허송세월>에 나오는
'늙기의 즐거움'의 앞부분 내용입니다.
휴대폰으로 날아오는 부고장을 보고 죽음을 '배달상품'으로
부고를 받을 때마다 과업처럼 느낀다는 작가님의 말이
인상 깊게 남습니다.
핸드폰에 부고가 찍히면
죽음은 배달상품처럼 눈앞에 와있다.
액정화면 속에서 죽음은 몇 줄의 정보로 변해있다.
무한공간을 날아온 이 정보는 발신과 수신 차이에 시차가 없다.
액정화면 속에서 죽음은 사물화 되어 있고
사물화 된 만큼 허구로 느껴지지만 죽음은 확실히 배달되어 있고
조위금을 기다린다는 은행계좌도 찍혀있다.
지금까지 살아온 시간의 관성적 질감은 희미한데,
죽은 뒤의 시간의 낯섦은 경험되지 않았어도 뚜렷하다.
이 낯선 시간이 평안하기를 바라지만,
평안이나 불안같은 심정적 세계를 일체 떠난 적막이라면 더욱 좋을터이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면 부고는 그다지 두렵지 않다.
내가 살아서 읽은 책 몇 권이 나의 마음과 함께 무로 돌아가고,
내가 쓴 글 몇 줄이 세월에 풍화되어 먼지로 흩어지고,
살았을 때 나를 들뜨게 했던 어수선한 것들이
애초부터 없었던 것처럼
적막해지는 사태가 좋거나 나쁜 일이 아니고 다만 고요하기를
나는 바란다.
이승에서의 신산한 삶을 위로할 만한 지복이나 구원이나 주막이
거기에 없어도 나는 괜찮다.
부고를 받을 때마다 죽음은 이행해야만 할
일상의 과업처럼 느껴진다.
마감을 지켜야 하는 원고 쓰기나 친구의 자식들 결혼식이나
며칠 먼저 죽은 친구의 빈소에 흰 돈봉투 들고 가서
얼굴을 내밀어야 하는 일처럼
죽음을 루틴으로 여기는 태도는 종교적으로는 경건하지 못하지만,
깨닫지 못한 중생의 실무이행으로서 적당하다.
애착 가던 것들과 삶을 구성하고 있던 치열하고
졸렬한 조건들이 서서히 물러가는 풍경을 쓸쓸해도 견딜만하다.
이것은 속수무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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